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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본당의날 기념 전신자 성지순례(황새바위 성지)
    윤중덕(바오로)  작성일 2018.08.05  조회 129     

황새바위성지 홈페이지 :  http://www.hwangsae.or.kr/home/ 

 

전신자 피정 장소와 날짜가 8월 사목회의에서 정해졌습니다.  

일시 : 2018년 9월 30일 (일)

장소 : 공주 황새바위 성지

회비 : 개인별 일만원 

 

자료 출처 : 서울대교구 굿뉴스 (http://www.catholic.or.kr/)

충남 공주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피를 뿌린 곳이다. 후백제를 일으키기 위해 수많은 군사들이 일어나서 웅진에서 싸우다가 나당 연합군에게 쓰러져 피를 흘렸다. 동학 농민 운동 때에는 전라도에서 발호한 수만 명이 우금치 고개를 넘어 공주로 들어오다가 참패, 죽음을 당했다.

 

의로운 피를 수없이 흘린 공주는 한국 천주교회가 안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함들 정도로 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거룩한 땅이요 충남 지역 신앙의 요람으로 전해진다.

 

공주는 한국 천주교 순교사 시초부터 끝까지 장엄한 신앙 고백의 피를 이어받았다. 조선 땅에서 천주교 박해가 공식적으로 시작되는 1791년 진산 사건으로 순교한 권상연은 공주에서 이주해 살다가 전주 땅에서 순교했고 '내포 지방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이 1784년 권일신으로부터 영세 입교한 후 충청도 지방을 전교할 때 공주 지역은 중요한 선교 거점이 되었다.

 

공주에는 일찍부터 충청도를 관할하는 관찰사와 공주 감영이 있었다. 충청도 각지역에서 잡혀 온 천주교인들은 공주 감영으로 이송돼 배교를 강요당하고 이를 거부할 때에는 여지없이 사형에 처해졌다.

 

공주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의 출신지를 보면 홍주, 예산, 해미, 덕산, 신창, 홍산, 연산, 청양, 보령, 진잠, 유구, 직산, 천안, 공주, 비인, 면천 등 충남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충북의 청주, 진천, 연풍, 옥천, 전라도의 전주, 광주, 경기도의 죽산, 포천 그리고 한양 출신의 유배 신자들 등 매우 다양하다. 충청도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붙잡힌 교우들이 공주 감영으로 이송돼 왔고 이들은 배교를 거부함으로써 바로 이곳 '황새 바위'라고 불리는 자리에서 처형됐다.

공주 들머리 언덕에 위치한 이곳은 바위위에 소나무가 밑으로 늘어져 있고 황새가 서식했다 해서 '황새 바위'로 불린다. 달리 '항쇄 바위' 또는 '황쇄 바위'라고도 한다.

 

이곳의 바위가 마치 죄수들의 목에 씌우는 칼인 '항쇄'의 모양과 흡사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칼을 쓴 죄인들이 이 언덕 바위 앞으로 끌려 나와 처형당했기에 '항쇄 바위'라 했다는 설이 있다. 또 '황쇄'에서 '쇄'가 옛말로서 '새'와 같다고 풀이해 '황쇄 바위'라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955년에 발행된 공주 천주교회 연혁에 보면 분명히 '황새 바위'라고 명시하고 있어 지금은 '황새 바위'로 통일해 부르고 있다.

 

공주 황새 바위에서 순교한 교우들 중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들만 해도 무려 248명에 이른다. 이중 가장 널리 알려진 순교자로는 병인박해 때 공주 감영에서 문초를 받으면서 관장이 살을 물어뜯어 신앙을 증거하라고 명하자 주저 없이 제 살을 물어뜯음으로써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한 손자선(토마스) 성인과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내포 지방의 사도' 이존창이 있다.

 

현재 공산성을 마주하고 아담하게 조성돼 있는 순교 성지 공주 황새 바위에는 한국 천주교회 2백주년을 기념해 공주 교동본당에서 세운 높이 13.8미터의 순교탑이 우뚝 서 있고 공주의 순교자 248위의 명패가 새겨져 있는 돌무덤 형태의 경당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순교 성지 입구에 유물 전시관이 아담하게 마련돼 있다.

 

박해 시대 한국 천주교회의 심장으로 불리었던 공주는 100여 리 안팎으로 주변에 대전을 비롯한 조치원, 온양, 예산, 당진, 서산, 대천, 유구, 논산, 부여 등이 인접해 있어 매우 교통이 편리하다.

 

공주는 순교 성지 황새 바위뿐만 아니라 사적 제12호인 백제 시대 대표적 고대 성곽인 공산성과 계룡산, 무령왕릉 등 백제 시대 고도(古都)의 정취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문화 유적지들이 산재해 있어 순례와 유적지 답사를 겸할 수 있는 흔치 않은 명소이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황새바위와 해미 생매장지 - 남형으로 숨져 간 순교자들의 넋

 

충청도에서 가장 많은 이들의 순교 터가 되어 온 곳은 공주와 해미, 그리고 홍주였다. 이 중에서 해미는 병마 절도사의 읍성이 있는 데다가 내포 지역과 가까웠으므로 1799년에 인언민(마르티노)과 박취득(라우렌시오)이 순교한 이래 박해가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특히 덕산의 '배나드리'(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3구)는 1817년에 해미 포졸들이 몰려와 신자들을 해미로 끌고 가서 처형한 애환을 담고 있는 교우촌이다. 또 그 이웃에 있는 '용머리'(현 삽교읍 용동리의 주래)는 인언민의 생매장지로, 1991년 이래 삽교 본당 신자들이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조성한 사적지가 있다.

 

관찰사가 주재하던 공주 감영에서는 순교자의 수가 다른 어디보다도 많았다. 지금의 공주시 반죽동 사대부고 자리에 봉황산을 뒤로하고 감영(監營)이 있었는데, 순교자들의 처형은 이 곳이 아니라 교동에 있는 금강변의 '황새바위'(옛 공주 형무소 자리, 일명 항쇠(項鎖)바위)에서 행해졌다. 또 영장이 주재하던 홍주에서는 주로 관아(현 홍성읍 오관리) 인근의 형지나 옥 안에서 신자들을 처형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정에서 순교자들에게 내린 판결은 원칙적으로 정법(正法), 곧 참수형이었다. 그러나 옥중에서 교수형을 당해 순교한 경우와 문초를 받다가 장형(杖刑)에 못 이겨 순교한 경우도 많았다. 교수형은 일반적으로 구멍이 있는 큰 돌(일명 형구돌)이나 벽에 뚫은 구멍에 줄을 넣고 순교자의 목을 얽어 맨 다음 반대편에서 줄을 당기는 방법이 있었고, 한 번에 많은 신자들을 처형할 경우에는 두껍고 큰 널 가운데로 여러 구명을 뚫고 줄을 꿴 다음, 신자들의 목을 구멍에 넣도록 하고 양쪽에서 줄을 당겨 죽이는 방법이 있었다. 1866년 11월에 홍주에서 교수형을 당한 김선양(요셉) 등 17명의 교우가 이 형벌로 순교하였다.

 

한편 홍주와 해미는 공주 감영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한국 행형사(行刑史)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남형(濫刑)이 자행되었다. 사람의 머리를 쇠도리깨로 치거나 큰 형구돌 위에 머리를 놓고 쳐서 죽이는 자리개질이 있었고, 사람의 머리를 누인 뒤에 대들보 형틀을 내리쳐 한 번에 여러 사람을 죽인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혹독한 것은 해미와 홍주에서 있었던 생매장이었다.

 

생매장은 천주교 신자들에게만 가해진 특이한 방법으로, 각지에서 체포되어 온 신자 수가 너무 많아 일일이 참수하기가 어렵게 되자 지방 관아에서 제멋대로 행한 것이었다. 해미의 경우를 보면, 읍성에서 조금 떨어진 조산리(造山里) 숲 속으로 끌고 가서 구덩이를 파고 신자들을 산 채로 묻어 버렸다고 한다. 이 사실은 훗날 여러 사람의 증언을 토대로 조사가 진행되었고, 1935년 4월 1일에는 마침내 그 현장이 발굴되었는데,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병인년 해미에서 있은 대박해의 진상은 벌써 70년이나 되는(1935년 현재) 옛적 일이므로 소년이나 청년 중에는 그런 일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노인 몇 분이 아직 생존하여 보고들은 바를 자세히 말해 주었으므로, 틀림없는 역사를 발견하여 천주의 영광과 치명자의 승리를 전하게 되었다.

 

노인들의 증거에 따라서 모든 사정을 자세히 조사한 후, 금년(1935년) '조산리'에서 치명자의 유해를 찾게 되었다. 그런데 교우들을 묻어 죽인 구덩이 속의 흙이 썩은 것을 보면 의심없이 몇 십 명이 되나, 아직 남아 있어 수습된 유해는 10여 명 가량밖에 안 된다. 병오년(1906년) 큰물에 봉분이 다 없어져서 무덤의 형적은 보이지 아니하였지만, 증인들의 가르침에 따라 똑똑히 안 후에 서산과 해미 관공서의 승낙을 얻어 발굴한 결과 유해를 많이 얻게 되었다("해미 치명자 유해", [경향잡지] 제29권 815호-제30권 822호).

 

혹독했던 병인박해와 관련된 순교 터 중에서 가장 먼저 사적지로 조성된 곳은 해미로, 대전교구에서는 1975년 10월 24일 이 곳에 순교 탑을 건립하였으며, 1983년 12월에는 생매장지를 확보하여 본격적으로 사적지 조성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1995년 9월에는 서산 상홍리 공소 뒷산에 안장되어 있던 생매장 순교자들의 유해를 순교 탑 아래로 옮겨 안치하였다. 다음으로 공주의 황새바위 순교 터는 교동 본당과 중동 본당에서 그 터를 매입한 뒤 1985년 11월 7일에 순교 탑과 기념 경당을 건립하였다. 또 황새바위 순교자 중에서 목천 소학골(현 천안시 북면 납안리) 출신의 배문호(베드로)의 시신은 가족들이 거두어 고향에 안장하였으며, 1990년 겨울에 그 무덤이 확인된 후 지금까지 사적지 조성 사업이 진행되어 오고 있다.

 

순교자들이 겪은 시련은 혹독하다 못해 처참하였다. 그러나 언제나 천상의 행복과 신앙 후손들에 대한 희망이 그들과 함께 있었다. "순교자의 피가 또다른 순교자를 낳고, 그들의 피가 공동체의 모퉁잇돌이 된 것이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48호(1999년 9월호), pp.121-123]

 

 

황새바위 성지 약사

 

공주 황새바위는 한국 천주교 역사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증언지 중 하나로 그 의미가 크다. 공주에는 일찍부터 충청남북도를 관할하는 관찰사와 지금의 시에 해당하는 감영이 있었다. 이곳 공주 감영에서는 각 지방에서 잡혀 숱한 심문과 무서운 고문을 당하고도 배교하기를 거절하였을 때에는 감사의 명에 의해 황새바위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충청도 각 지방뿐 아니라 타 지역으로부터 끌려와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교우들도 많았다. 충남의 홍주, 예산, 해미, 덕산, 신창, 홍산, 연산, 청양, 공주, 이인, 탄천과 충북의 청주, 진천, 연풍, 옥천, 전라도 전주, 광주, 경기도 죽산, 포천, 그리고 한양의 교우들이 공주에 와서 순교 하였다.

 

이곳 황새바위에서 천주학 죄인들을 공개 처형할 때에는 맞은편 산 위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마치 병풍을 친 모양으로 둘러서서 구경을 하였다고 한다. 처단한 죄인들의 머리는 나무위에 오랫동안 매달아 놓아 사람들에게 천주학을 경계하게 하였으며, 그들의 시체는 강도, 절도범들의 시체와 섞여 어느 것이 순교자의 것인지 구별하기조차 어려웠다. 황새바위 앞을 흐르는 제민천은 지금처럼 둑이 쌓여 있기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는데, 홍수로 범람할 때에는 순교자들의 피로 빨갛게 물들어 금강으로 흘렀다고 한다.

 

순교자들은 참수, 교수, 돌로 맞아 죽음, 옥사, 아사, 매질 등으로 죽어 갔는데, 교회사가 달레(Dallet,Claude Charles)는 공주 감영에서 있었던 교수형에 대해 "옥의 벽에는 위에서부터 한 자 높이 되는 곳에 구멍이 뚫려 있다. 매듭으로 된 밧줄 고리를 죄수 목에 씌우고 밧줄 끝을 벽의 구멍으로 내려보낸다. 그리고 옥 안에서 신호를 하면 밖에서 사형 집행인이 밧줄을 힘껏 잡아당긴다. 희생자가 죽으면 시체를 밖으로 끌어내어 장례도 지내지 않고 밭에 내버려 둔다." 고 묘사하고 있다. 때로는 구멍이 있는 형구돌이 사용되었는데 구멍에 줄을 넣고 죄수의 목에 얽어맨 다음 형구돌의 반대편에서 줄을 잡아 당겨 죽였다.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공주에서도 병인박해 당시에 가장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고, 조정의 박해령이 멎은 뒤에도 지방에서는 아직 그 여파가 남아서 피흘림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공주는 순교 역사의 시초부터 기록상 마지막으로 순교자를 낸 1879년까지 100여년 동안 줄곧 피를 흘리며 신앙을 고백했던 참으로 거룩한 땅이다. 달레는 "공주 옥에서 순교한 이들의 이름과 숫자를 다 알 수 없었다." 고 말한다. 공주 감영록이 세상에 공개되기 전까지는 우리 순교자들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공주에서의 순교자들은 당시 '사학의 괴수'로 알려져 있던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꼬)과 10여명의 회장들을 비롯해 연령, 성별, 신분에 관계없이 무수히 많다. 가장 나이 어린 순교자는 김춘겸의 딸로 당시 불과 10살 밖에 안 되었고, 최연장자는 남상교(아우구스티노)로 당시 84세였다. 20세 미만의 순교자도 20명이나 되었으며, 양반, 중인, 농민, 노비 등 그 신분계층도 다양했다. 특히 어린이와 부녀자들까지도 온갖 고문과 회유, 공포속에서 배교하지 않고 순교로써 신앙을 굳게 지켰다. 황새바위라는 명칭의 유래는 이곳 가까이에 황새들이 많이 서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혹은 목에 큰 항쇄 칼을 쓴 죄수들이 이 언덕바위 앞으로 끌려나와 죽어갔기 때문에 항쇄바위라 불리기도 했다. [출처 : 황새바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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